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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알자마자 기록한 글들인데, 안정기가 되면 공개할 예정이었어요.
결과는 유산으로 끝났지만 경험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정리하고 다듬어 남깁니다.
마리는 훼이크 (나의 짧은 임신기)
#6. 세번째 초음파 - 계류유산 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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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듯 길고 긴 일주일을 보냈다.
괜찮아졌다가 안괜찮다가 좋아진 듯하다가 그렇지 않은 것 같고 아무렇지 않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물론 심적으로.
멀쩡하게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나름 잘 잤다.
다만 밥 먹을 땐 굳이 먹어야 하나 생각이 들었고, 일할 땐 집중이 잘 안되고, 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최군과 나는 차분히 감정을 달래고, 분명히 슬픈 일이지만 차라리 여러가지로 잘 된 일일 수 있다고 서로에게 설득시켰다.
우선 우리가 불임이 아니라는 걸 양가 어른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결혼한지 4년이 됐는데 아이가 없어 양가 부모님들은 우리가 불임이 아닌지 걱정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비록 유산이지만 임신을 경험해보니, 최군도 나도 아이가 생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전까지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우리가 이번 일로 아이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될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만약 다음에 아이가 찾아온다면 어떨지 자연스럽게 상상이 된다.
이미 벌어진 일은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는 걸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막상 병원에 가니 덜덜 떨려오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은 계류유산임을 확진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주 진료로 유산임을 확신했다.
그도 그럴게 출혈도 전혀 없고 유산의 징후라는 것은 없긴 했지만, 지속적으로 메스껍던 속도 괜찮아졌고 방광염인가 싶을 정도로 자주 가던 화장실도 뜸해졌다. 또 체온도 내려갔고, 피곤함도 덜했다.
그 외에 임신이라고 할 만한 증상은 자꾸 먹는 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초음파 화면으로 변함없이 뻥 뚫려있는 까만 구멍만 발견하고 계류유산을 확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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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지난 주처럼 멘붕이 오진 않을까 걱정되어 진료받을 때 물어보고 챙겨야 할 내용들을 침착하게 해결했다.
유산진단서를 받고, 수술 일정을 잡고, 수술 전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하고, 바우처를 신청할 수 있도록 병원에 정보 등록을 요청 했다.
그리고 직장에는 유산 휴가를 신청했다.
법이 개정되어 이제 유산을 해도 국민행복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또 임신주차에 따라 유산휴가를 받을 수 있다. 나의 경우 8주차였기 때문에 5일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가장 하기 싫었던 일 중 하나는 주변에 다시 유산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최군에게, 시부모님께, 친정 부모님과 동생에게.
그리고 임신 소식을 알렸던 친구들에게. 그리고 직장에.
다행히 정말 가까운 주변에만 알린 덕에 유산 소식을 전하는 데 괴로움은 덜했다.
게다가 감사하게도 주변의 배려로 나는 유산 후 조리 중 제일 중요하다는 마음조리를 일찍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는 휴가를 주었고, 상사는 나의 휴가에 대해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잘 둘러 이야기 해 준 듯 하다.
물론 나와 친하거나 업무상 양해를 구해야 하는 분들께는 직접 이야기 했다.
최군도 함께 출산 휴가와 연차를 써 내 옆에 붙어있어 주었고, 시댁은 나의 컨디션을 배려해 주셨다.
친정과 친구들은 걱정 어린 목소리와 담백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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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부터 유산, 계류유산, 유산 수술 등 생각나는 모든 검색어를 인터넷창에 검색해 아는 내용도 몇 번이나 찾고 읽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혹은 다른 경우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같이 공통적인 부분이 있었다.
스스로를 책하게 된다는 것과 자꾸 괴로운 일을 되뇌이고 되뇌여 안그래도 슬픈 일을 스스로 더 큰 슬픔으로 만들어 눈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혹시 나와 같은 일을 겪은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작은 위로라도 되길 바라며 또 스스로 다짐하며 적어본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유산은 특정한 누군가의, 특히 나의 잘못이 아님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슬픈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러므로 나를 포함해 누군가를 책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나의 몸. 무엇보다 나를 위해, 또 후에 있을지도 모를 아이를 위해 유산 후에도 몸조리에 신경쓰자.
결과적으로 아이가 있건 없건, 나는 나의 생활을 유지할 활력을 되찾도록 애써보자.
괜찮다. 다음에 또 기회가 올테니 그 때 있는 힘껏 잘 하면 된다.
혹 그 기회가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망보다는 잠깐이라도 와 줬던 아기에게 감사하자.
뭐, 나의 경우에는 자궁의 훼이크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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