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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Day But Today/오늘 쓰는 어제 일기

[일상.마리는훼이크] 나의 짧은 임신기 #4. 서운한 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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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알자마자 기록한 글들인데, 안정기가 되면 공개할 예정이었어요.

결과는 유산으로 끝났지만 경험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정리하고 다듬어 남깁니다.


마리는 훼이크 (나의 짧은 임신기)

#4. 서운한 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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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임신한 팀장님과 함께 근무할 일이 있었다.

임신부는 예민하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정말 다른 일이다.

그 때 당시 한 여직원이 남직원에게 업무를 전달하는 데 팀장님이 버럭 화를 낸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좀처럼 끝나지 않아서였는지 팀장님이 "지금 뭐하는거야!" 하고 소리쳤고, 사무실 내의 모든 시선이 세사람에게 꽂혔다.

그리고 후에 팀장님은 "두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화를 내고나니 속은 시원하다"는 말에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몰라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임신했다지만 그 말은 팀장님이 잘못한 일인 듯 하다.


이런 기억이 있다보니 직장과 가정에서 조심하려고 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한 번 더 생각하고, 특히 최군을 괜한 화풀이나 짜증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신경쓰려고 했다.

원래도 생리기간에 맞춰 극도의 예민함을 지참하고 감정기복의 산을 타는 나이다.

그걸 옆에서 맞춰주는 최군을 발견할 때마다 안쓰럽고 미안하다.

물론 내 마음만큼은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배려하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먹은 스스로가 뿌듯하고 대견했지만, 서운함을 이기진 못했다.

그렇게까지 서운할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은 마치 남인 듯 내 생각을 고려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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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은 내 생일이었다.

평소에도 특별히 기념일이나 생일에 의미두고 챙기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이 날 만큼은 생일을 핑계로 가까운 지인들의 반가운 연락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연락하는 김에 임신 소식도 함께 알리면서 겸사겸사 축하도 받았다.

시부모님도 미역국을 챙겨주시고 맛있는 것이라도 사먹으라고 용돈도 챙겨주셨다.


그런데 막상 가장 가까운 최군과 엄마는 한마디 말 없이 까맣게 잊은 듯했다.

저녁 즈음에야 최군은 시어머님께 연락을 받고, 그제야 생각이 났다면서 '마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생일은 둘째치고 '마리 때문'이라는 말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조용히 복수심에 불탔다.

나중에 최군이 마리한테만 신경쓴다고 서운해하면 이번 일을 꼭 말해줘야겠다고 맘먹었다.

"마리가 뱃속에 있을때 자기도 마리만 신경쓰느라 내 생일도 잊어버렸잖아요."라고.

다시 생각하니 참 치사하고 쪼잔함에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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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이 아니다.

전 같으면 흘려 넘겼을 법한 언짢은 말 한 마디도 그냥 넘기질 못했다.

하루 이틀 지나도 감정이 해소되지 않으면 최군한테 다짜고짜 그 때 그 말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 번은 회사에서 일하다가 북받쳐서 울고 점심시간에 장문의 카톡을 작성해서 최군한테 보냈다.




톡을 작성할 때 가능한 최군에게 상처주지 않으면서 내 언짢은 기분을 표현하고 싶어 신중히 말을 골라가며 썼다.

다시 보니 참 공들여 꼬장을 부렸구나 싶다.

최군은 정말 당황스러웠을텐데 고맙게도 꼼꼼히 읽고, 귀엽게 내 말대로 생각할 시간까지 갖고,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사과해줬다.

그리고 저 방정맞은 이모티콘은 대체 무엇!

솔직히 최군한테 정말 감동했고 고마웠다. 알아주는 것 같아서.

약속대로 이 일에 대해 다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때 최군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정말 물어보고 싶지만, 혹시 모를 감동파괴를 예방하기 위해 아주 나중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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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는 먹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워낙 초기에 알아 입덧이 없음을 감사하며 최대한 필요한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려고 신경썼다.

그런데 시댁과 최군이 먹는 것에 너무 공을 들여서 부담스러웠다.

평소에 먹는 것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임신했으니 고기, 고기, 고기, 채소, 채소, 채소, 듬뿍, 듬뿍, 듬뿍!

이렇게 신경써주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먹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전에는 먹고싶지 않으면 안먹으면 그만이었고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속이 메슥거리다가도 막상 입에 넣으면 신기하게도 음식물이 꿀떡꿀떡 잘도 넘어갔다.

정말 복에 겨운 망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차라리 입덧이 있어 먹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고민을 엄마한테 얘기했더니 엄마가 아주 엄마다운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거 애가 나올 때까지 계속 그럴거야. 괜찮아, 속 메슥거리는 건 출산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없어져.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거지. 어쩌냐? (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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