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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알자마자 기록한 글들인데, 안정기가 되면 공개할 예정이었어요.
결과는 유산으로 끝났지만 경험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정리하고 다듬어 남깁니다.
마리는 훼이크 (나의 짧은 임신기)
#3. 안녕? 반가워 마리!
며칠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부지런히 열었다.
생리 날짜를 기록해 둔 애플리케이션은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기준으로 출산 예정일을 정하고 오늘은 6주 5일째라고 알렸다.
애플리케이션의 날짜를 참고해 임신 출산 백과사전의 2개월 즈음을 더듬으며 나와 아기의 상태를 체크했다.
엄마는 임신 증상들이 나타나고, 빠르면 입덧을 시작하는 시기. 아기는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고, 사람 형태를 갖추어 가는 시기라고 했다.
나의 경우 우선 생리가 멈췄고, 쉽게 피곤해지고, 업무가 힘들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생리통처럼 배가 살살 아팠고, 두통도 있었지만 원래도 그런 증상이 있어서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원래 물을 잘 안마시는데 목이 말라 물을 자주 마셨고, 화장실도 1시간에 1~2번 꼴로 자주 갔다.
아기는 영양소와 에너지가 많이 필요할테니 입덧때문에 음식을 못먹지 않는 한 최대한 필요한 영양소를 생각해서 먹고 좋지 않은 음식들을 먹지 않으려고 했다. 좋아하는 커피와 초콜릿 등을 단번에 끊었으니 이정도면 생색내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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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되면 병원에 가야하니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 인터넷 창을 들락거렸다.
출산 때가 되면 어차피 출산이 가능한 병원으로 옮겨야 하니 처음부터 출산이 가능한 병원으로 가서 꾸준히 진료받고 싶었다.
병원은 집에서 멀지 않고, 교통이 편한 곳, 24시간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곳이 좋은데 나의 경우 집이 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어서 어디로 가든지 비슷했다.
주로 남편이 차로 동행해주겠지만 혹시 혼자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비교적 집에서 가기 편한 화정역 근처로 가기로 했다.
첫 진료이긴 하지만 어떤 병원일지 궁금해 봄 여성병원으로 가보기로 했다.
다음은 임신 확인서를 받으면 할 일 리스트를 적었다.
보건소에 가서는 임산부 등록을 하고, 필요한 검사를 하고, 국민행복카드를 발급받고, 직장에는 12주가 될 때까지 단축근무를 신청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해야 할지 찾다보니 시간은 하릴없이 흘렀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마음을 잡아둘 수 없었다.
아마 이럴 때 '기대한다'는 표현을 쓴다. 아닌 척 했지만 나는 이미 기대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설레고, 그 아이와 같이 지내면서 많은 것들이 바뀔 우리의 인생을 상상하며 기대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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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부터 바삐 움직여서 간 봄 여성병원은 내 생각보다 컸다.
건물 전체가 병원이었다. 사람도 많고 큰 병원인만큼 진료과목마다 층수도 나뉘어 있었다.
2층에서 접수를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신체검사실(?)에서 간단하게 혈압과 몸무게 등을 재고 증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이 많이 구획을 나뉘어 놓아 이리저리 움직이긴 했지만 나름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첫 진료라 가볍게 생각한데다 큰 병원인 지도 몰라 예약 할 생각을 못한 것이 내 불찰이었다.
일반 진료로 접수해 2시간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나왔다.
처음오는 일반 진료자를 조금만 배려했다면 접수할 때 빈 시간에 예약을 안내해 줄 수 있었을텐데.
혹은 오래 기다리는 일반 진료자를 눈앞에 뒀다면 귀뜸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텐데.
물론 예약제인줄 모르고 그냥 간 나의 실수가 가장 컸지만 그런 부분은 정말 아쉬웠다.
빠른 포기(?) 후 봄 여성병원을 나와 화정역 바로 근처에 있는 진세진 산부인과로 이동했다.
의사 선생님이 여성분이라 좋았고, 병원 대기실과 화장실, 진료실 등이 깨끗하고 비교적 한적했다.
초음파로 자궁 내에 작은 까만 점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임신낭이었다. 크기는 0.44cm.
생리 주기때문인지 애플리케이션의 정보와는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의사샘은 4주정도 됐고, 3주 후에 아기 심장소리를 듣고 임신 확인서를 써주겠노라고 말했다.
이미 마음은 앞서 보건소도 다녀오고 국민행복카드도 받고 단축근무 신청까지 마쳤는데.
그래도 조금 더 신경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니 좋은 것 맛있는 것 먹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접수부터 진료를 모두 마치고 나오니 30분정도 흘러 있었다.
이미 전 병원에서 오랜 기다림에 지쳐있던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속도였다.
"더 빨리 이동할 걸", "그래도 나오길 참 잘했어요" 따위의 말을 주고받으며 파란만장한 첫 진료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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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쫄쫄 굶고 배고픔이 극에 달한 우리가 선택한 메뉴는 닭칼국수!
집에 오는 길에 일산교자에 들러 세상 맛있게 칼국수를 흡입했다.
점심메뉴의 안주거리는 우리의 임신 사실과 부모님께 언제 알릴 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어리지 않은 나이인지라 주변에서 보고 들은 바 유산 위험이 높은 12주를 넘기고 주변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좀 달랐다. 유산의 위험이 높은 만큼 더 신경써야 하니 일찍 말씀드리고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도움을 받는 내용은 사실 먹을 것에 관한 내용이다.
사실 우리 부부는 근무시간이 달라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는 편이라 밥상을 차릴 일이 별로 없다.
게다가 함께 먹을 때는 외식을 하거나 레토르트 음식으로 간편하게 먹는 편이라 음식에 관한 것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남편 말은 시댁이 바로 앞동이니 퇴근 후 나의 밥그릇도 앞동 저녁밥상에 올리자는 내용이었다.
시부모님도 반가워하실거고 시아버지가 암투병하시는 바람에 강제로 건강식을 하고 있으니 그리 어려울 것 없다는 논리에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와중에 봄 여성병원에서 우리를 찾는 전화가 왔다.
우리가 접수한 시간이 9시 20분경이었는데, 전화를 받은 시간은 1시 30분경이었다.
4시간이 지나서야 순서가 왔나보다.
다시한번 우리는 빨리 포기하고 나오길 참 잘했으며, 다음에 갈 땐 예약을 꼭 할 것과 아마 우리는 그곳에 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견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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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장을 양껏 본 후 시댁으로 향했다.
분홍색 봉투에 임신테스트기와 오늘 막 찍은 따끈따끈한 초음파사진을 동봉해 시부모님께 건넸다.
우리 시부모님은 원래도 반응이 그리 크지 않으신 분들이라 그닥 드라마틱한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혹 부담가질까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솔직히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게됐다.
그리고 친정과는 거리가 있어 전화로 알리게 됐다.
내가 낮잠에 취해 있는 사이에 남편이 통화했는데 엄마 목소리가 감정에 따라 널뛰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태몽 이야기를 들었다.
태몽은 시아버지가 꾸셨는데 말 두마리가 들판에서 뛰어다니다 잘생긴 말 한마리가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꿈이었다고 했다.
남편은 그 이야기를 듣고 태명을 '마리'라고 지었다.
단순하지만 예쁜 이름이라 마음에 들었다.
안녕? 마리!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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