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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알자마자 기록한 글들인데, 안정기가 되면 공개할 예정이었어요.
결과는 유산으로 끝났지만 경험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정리하고 다듬어 남깁니다.
마리는 훼이크 (나의 짧은 임신기)
#5. 두번째 초음파 - 계류유산 (feat. 이별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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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빨리 임신 확인서를 받고 싶었다.
아기도 보고싶고, 심장소리도 듣고, 내가 정확히 몇주차인지 알고 제대로 신경쓰고 싶었다.
또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었고, 임신부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다 누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임신 확인서도 받고, 보건소에 들르고, 바우처도 신청하고, 직장에는 단축근무도 신청하는 등 적어둔 리스트를 얼른얼른 실천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말에 가도 되는데 굳이, 연차까지 써가며 굳이, 들이붓는 폭우에도 굳이, 굳이 병원에 갔다.
초음파로 보이는 태낭은 제법 커져있었다. 구멍이 뻥 뚫린 것 마냥.
이상했다. 저 구멍 안에 태아와 난황이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아무리 빨리 갔어도 6~7주정도는 됐을 시기였고, 태아의 심장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 터였다.
변하는 그림은 없는데 의사선생님이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다시 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난번 첫 검사때가 4주, 이제 6~7주 정도 된 듯하다고 했다.
태낭은 제법 커져서 2cm가 넘었는데, 보여야 할 태아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위로가 될 지 모르겠지만"으로 입을 뗀 의사 선생님은 나름의 경위를 설명했고, 나는 기어이 계류유산이라는 단어를 듣고야 말았다.
수정할 때 염색체가 없는 텅 빈 난자 혹은 정자로 수정이 되어 임신낭은 생겼으나 아기가 생기지 않은 듯 하다고 했다.
또 아기가 생겼다 해도 염색체에 이상이 있는 경우 기형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 또한 높은 확률로 유산된다고 했다.
그 후에도 임신이 처음인지, 하혈의 여부 등을 문답하고 만약의 경우를 보기 위해 1주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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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원래부터 계획하고 기다렸던 아기는 아니었다.
유산은 4명 중 1명 꼴로 겪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 1명이 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한걸까.
설마 눈물이 차오를 줄이야.
의사 선생님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내가 울다니.
속에서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나도 모르는 새에 다졌던 어떤 각오들이었나보다.
나는 이렇게나 빠르고 또 확고하게 마리에 대한 각오를, 그리고 그 이후 많은 것들에 대한 생각과 다짐을 했었나보다.
병원을 나오며 지난 2~3주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봤다.
갑자기 편도가 부으며 염증으로 번졌지만 그래도 약은 먹지 않았다.
하루 이틀정도 후에 가라앉았지만 이후 열이 올랐었다.
체온을 재봐도 내가 느끼는 것보다는 미열이었고, 기운이 없었을 뿐 아프진 않았다.
원래도 심하진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울렁이던 속도 얌전해졌고, 1시간에 1~2번 꼴로 화장실에 가던 횟수도 제법 뜸해졌다.
임신부에게 감기증상은 원래 있다고 하니 당연하게 생각했다.
별 의심없이 괜찮다고만 생각했던 내가 바보같았다.
*
하필 폭우가 내리는 날. 우산에 휴지에.
세상의 모든 물이 내 눈 앞으로 모이는 기분이었다.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
택시 승강장에서 내가 울면서 우산을 들고 어쩔 줄 몰라하는 걸 안에서 지켜보던 기사님은 앞 좌석 의자를 당겨서 최대한 넓게 만들어 두셨다.
김연우는 이별택시를 부르며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하고 꼬장을 부렸지만 나는 히끅거리면서도 제대로 목적지를 말해야 했다.
빗물 사이로 더 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듯이 비는 더욱 거세게, 아직 멀었다는 듯이 창문을 때렸다.
기사님은 우는 손님이 처음은 아니라서였는지 내가 안쓰러워서 였는지 말을 걸어주셨지만 병원에 다녀왔다는 내 말에 금방 입을 닫으셨다.
택시 안에 흐르는 침묵 위로 많은 생각과 태도가 흘러갔다.
빈 임신낭에 이름 지어주고, 있지도 않은 아기를 위해 잘 먹겠다고 그 난리를 피웠던 걸 등신같다며 마음껏 비웃었다.
그 와중에 속도 없이 배가 고팠고, 먹지 않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난황도 안생겼으면서. 또 어이없어 하면서 빈정거렸다.
그동안 다짐하고 각오했던 것들이 떠오르자 그런 생각 할 필요도 없었다며 부정했다.
김칫국 마시다 고춧가루가 목구멍에 달라붙은 기분에 열심히 코를 먹었다.
임신 소식을 반가워했던 남편과 시부모님, 엄마의 목소리가 실망으로 바뀔거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러워졌다.
한참을 히끅거리다 조금 진정이 되어갈 즈음 최군에게 전화가 왔다.
벨이 울리는 순간부터 또 눈물이 터졌다.
눈치 빠른 최군은 내 목소리만으로 많은 것들을 예상해냈는지, 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퇴근길이니 최대한 빨리 나에게 가겠노라고 말해주었다. 최군의 목소리를 듣고나니 주변이 보였다.
아직도 거센 폭우, 반대 차선으로 달리는 차들이 뿌리는 물보라, 샌들채로 축축히 젖은 발, 그리고. 그리고.
세상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한동안은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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