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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Day But Today/오늘 쓰는 어제 일기

[일상.마리는훼이크] 나의 짧은 임신기 #1. 공공연한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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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알자마자 기록한 글들인데, 안정기가 되면 공개할 예정이었어요.

결과는 유산으로 끝났지만 경험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정리하고 다듬어 남깁니다.


마리는 훼이크 (나의 짧은 임신기)

#1. 공공연한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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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8일 : 임신 테스트기 양성


난 생리가 불규칙한 편이다. 평균 35일 주기이지만, 어떤 달은 42일을 넘기기도 했다.

마지막 생리 시작일이 6월 26일.

평소에 생리 주기 체크할 겸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은 네가 마지막 생리 시작일로부터 40일이 넘었으며, 임신이냐고 물었다.

내가 만일 결혼하지 않았고, 임신을 절대적으로 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알림이 뜰 때마다 덜컥 겁이 났을 것 같다.

만약 오늘 잠들기 전까지 생리를 시작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엔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들었다.


며칠 전부터 생리하는 꿈을 연속으로 꾼 터라 곧 생리를 시작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시행한 임신 테스트의 결과가 의외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 해보면 왜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난 달 아슬아슬한 가임기에 관계를 하기도 했고, 평소엔 꾸지 않던 생리하는 꿈도 연속해서 꾸었는데.

꿈은 현실의 반대라고도 말하지 않나. 예민한건지 둔한건지 참 헷갈린다.



희미한 선도 아니고 아주 또렷한 선으로 임신이었다.

내게 아주 드라마틱한 반응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 감정의 시작이 절망이나 걱정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음에 감사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감정은 순식간에 만감으로 교차한다.

놀람, 기대, 내심 기분좋음, 떨림, 두 눈을 의심, 안도 같은 감정들이 다녀간 것 같다.


그래도 너무나 현실적인 장면에 나도 모르게 무슨 연출이라도 해야 하나 싶긴 했다.

아주 솔직하게 현실을 묘사하자면,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눈도 다 못 뜬 채로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하품을 크게 한 뒤엔 찔끔 흘린 눈물을 손등으로 쓰윽 문질렀다.

한 손에는 임신 테스트기를 덜렁덜렁 들고, 흐릿한 눈으로 스멀스멀 번져가는 시약종이를 바라봤다.

남편 최군에게 임신 테스트기를 보여줘야 할텐데 어떤 연출을 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지금 딱히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영상을 찍고 있는 건 아니니까. 쓸데 없는 직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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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부부는 공공연하게 아이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아이가 생긴다면 기꺼이 낳겠지만, 애써서 아이를 갖고싶어하진 않았다.

그래서 최군의 반응은 어느정도 예상은 됐지만, 그가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하면서도 알고싶지 않았다.

내가 엄마가 된다는 부담만큼 최군도 아버지가 된다는 어떤 종류의 의무감이 분명히 들터.

결혼을 해서 서로의 반려가 된다는 것과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일로 느껴졌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 안방에서 자고 있는 최군에게 어떻게 임신 소식을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

병원까지 다녀와서 확인한 후에 알릴까, 맛있는걸 먹으면서, 혹은 주말에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생각은 어지러이 떠도는데 정리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행동은 빨랐나보다. 출근 준비가 평소보다 빨리 끝나 시간이 남았다.


최군 얼굴이나 보고 나갈 생각으로 조용히 안방 문을 열고 침대 발치에 앉았다.

잠귀가 밝은 사람이라 내가 앉자 살짝 깬 듯했다.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생각했지만 내 의도와는 달리 나는 최군의 발바닥을 후려치고 있었다.

장난 친다고 허우적거리는 최군을 완전히 깨워 앉히고 불을 켰다.

그리고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었다.


최군의 반응은 딱히 신선하진 않았다.

다만, 예상대로 웃고 생각보다 더 좋아했고 나보다 더 벅차했다.

그 역시 감정의 시작에 부정 없다는 점에 나는 한번 더 감사했다.


공공연하게 아이를 기다리지 않던 우리에게 찾아와 준 뜻밖의 아기가 환영 받고 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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