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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Day But Today/오늘 쓰는 어제 일기

[어제일기] 기록하는 습관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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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습관의 중요성에 관해 많이 듣는다. 나는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매년 다이어리를 꽉꽉 채워쓰고 그 외의 수첩도 쓰는 편이라 이정도면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펜으로 끄적이는걸 좋아하는 나는 그게 뭐든 다 적었다. 공부할 때도 기왕이면 깜지를 썼고, 성경필사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했고, 노래가사 적는것도 좋아하고, 통화하면서도 낙서하고, 회의록 작성도 좋아하고, 기획서도 좋고, 그냥 적는걸 좋아했다. 꾸미는 건 못했다. 뭐든 다 적다보니 예쁜 글씨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어른글씨가 되었다. 그냥 연필이나 펜으로 보고 듣고 생각나는 흐름을 꽉꽉 채워 적고 한번더 정리하는 걸 좋아했을 뿐이다. 난 솔직히 다이어리를 꾸미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냥 내용이 잘 보이기만 하면 된다.

 

고등학생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일기는 열심히 썼다. 당시에는 노트를 감정의 쓰레기통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쓰고나면 왠지 개운해졌기 때문이다. 좋은 일, 나쁜 일, 감정적인 생각과 의미없는 고민들을 노트에 휘갈기다보면 적어 내려간 만큼, 반복한 만큼 감정이 흘러내려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다. 격동의 시기를 보냈을텐데 기억을 못하는 건 잊어버릴 만큼 적어내려간 일기장을 다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일기장을 찢으면서 기억도 다 찢었나보다. 아닌가, 적으면서 기억을 지운건가...

일기를 다 찢어버린건 지금 생각해도 참 괴팍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기장이 한권도 아니었고, 한권을 한번에 찢을 수 없으니 다 펼쳐서 두어장씩 찢어 조각내버렸으니 찢는데도 무척 힘들었을텐데 꿋꿋이 다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찢어버린 이유는... ㅎㅎㅎ 동생이 일기장을 몰래 들춰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생이 보는 앞에서 일기장을 정성스럽게 찢어버리고, 한두달을 동생과 말을 일절 섞지 않았다. (성격 진짜...) 지나고 생각하니 그래도 역시나 괘씸하다.

그 이후로는 감정기록을 자제하게 되었다. 하지만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 벅찬 일이 생기면 노트를 찾게됐는데, 그마저도 당시 남자친구의 호기심으로 일기장이 들춰진 걸 보고 극대노하는 일이 또 생겼다. 심지어 일기장을 동생이 봐서 다 찢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일기장을 들춰보고 싶어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별거 없는데 왜그리 화를 내냐고 말했었다. 별거 없으면 보지 말라는 걸 봐도 되는거냐 개잡놈아. 그래서 일기장과 관음증상은 떼놓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공연과 영화를 좋아하고 시나리오나 연출을 끄적이는 풋내기 영상 학도였다. 한때의 생각과 감정이 묻은 메모들이 나에게 도움이 될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감정 메모를 즐겨했고(자제하긴 했지만), 하나하나 버리기 아쉬워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감정기록을 그만두었다. 앞의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누군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그냥 감춰두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쓰질 말아야 하는거구나. 아니면, 쓰더라도 바로 없애버렸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감정의 배출구를 삭제당한 덕에 성격이 아주아주 지랄맞아졌다. (아마도..ㅎㅎ)

이후로는 노트의 내용이 많이 바뀌었다. 누가 봐도 상관없는 것들로 채워졌다. 스케줄과 할일리스트, 독서리스트, 프로젝트리스트, 회의기록 등 각종 리스트가 노트를 차지했다. 그리고 가끔 마음에 드는 시구나, 가사, 공감하는 대사, 인상깊었던 문구 등을 휘갈기게 되었다. 이제 나는 기분은 노트에 적지 않는다. 미래에 읽을 나에게 담백한 보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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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로써 다이어리를 쓰다보니 자연스레 노트의 효율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이 불렛저널이다. 효율적이지 않으면 속이 터지는 나는 불렛저널을 발견했을 때 정말 반가웠다. 나의 수첩은 이미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불렛저널에 가까웠지만,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기록하는 여러 사람의 저널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렛저널은 인덱스, 퓨처로그(연간,분기별 기록), 먼슬리로그(월간기록), 위클리로그(주간기록), 데일리로그(일일기록), 컬렉션 등을 기본으로 본인에게 맞는 것만 취해 기록하는 방식이다. 즉, 내 입맛에 맞는 다이어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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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다이어리가 나의 감정배출구였다면, 지금은 일상의 보고서가 되었다. 다이어리는 지금도 잘 쓰고 있긴 한데... 근데 왜이리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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